시인 김수영. 시인 박인환...

spiiike 2009. 1. 13. 09:48

내가 시를 처음 쓴 날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중학교 때 중간고사 기간이었나, 동네 친구들끼리 동네 독서실에서 밤 새 공부를 했다.
잠깐 옥상에서 쉬는 시간, 서로 시를 한 번 써 보자 내기를 하고(지금 생각하면 참 풍류가 있었던거 같다...끼끼)
다시 독서실로 내려가 스프링으로 묶인 300원 짜리 연습장에다 냅다 시를 쓴 적이 있다.
써 보지도 않은 시를 쓴 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냐.
쓰고자 하는 감정을 불러 일으켜 생각으로 다시 말로 글로 구체화 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만
300원 짜리 연습장 표지에 있던 한 편의 시, 박인환의 목마와 숙녀는 어린 사춘기 시절, 밤마다 몽정을 겪는 여린 학생에게는 주체못할 감정의 풍랑을 주기에 충분했었다.





목마와 숙녀
                  -박인환-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거저 방울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볍게 부서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 작가의 눈을 바라다보아야 한다

…등 대…

불이 보이지 않아도

그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그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 개의 바위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 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 바람소리는

네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박인환,
전쟁 전 후, 명동거리를 누비던 모더니스트, 뒤에 언급할 김수영과는 둘도 없는 친구였고
둘도없는 서로의 비평가였고, 둘도 없이 미워하던 사이였던 시인.
서른 초반 술에의해 죽음을 맞이하는 요절 시인.

목마와 숙녀를 접했던 시절
박인환이라는 이름과 세월이 가면이라는 또 다른 시를 알고 있었는데
훗날
명동백작이라는 EBS 드라마에서 그의 족적을 상세히 볼 수 있었고
세월이가면의 노래가 탄생하는 장면에서는
그 시대를 너무나도 동경하게 되었었다.

술 한 잔 걸친, 가수나애심, 음악가 김진섭, 시인 박인환이
선술집에서 술 또 한잔 걸치며 시를 쓰고 그 시에 곡을 붙이고 그렇게 나온 노래를 나애심이
그 자리에서 노래를 불렀다 한다.




김수영은 박인환과 둘도 없는 친구로 시작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시에 대한 관점이 너무도 달라 둘은 절교의 상태로 있다가
박인환이 먼저 요절을 했고 김수영은 419 혁명이 일어난 후 얼마 후
인도로 뛰어든 버스에 치어 죽었다고 한다.



어느 날 고궁(古宮)을 나오면서

                                      
                                         - 김수영 -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王宮) 대신에 왕궁(王宮)의 음탕 대신에
오십(五十) 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 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越南)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이십(二十) 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정서(情緖)로
가로놓여 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에 포로수용소의 제사십야전병원(第四十野戰病院)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어스들과 스폰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어스들 옆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폰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다
개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비명에 지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나무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아무래도 나는 비켜 서 있다 절정(絶頂)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이십(二十) 원 때문에 십(十) 원 때문에 일(一) 원 때문에
우습지 않으냐 일(一) 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이 얼마나 가슴을 두드리는 시인가.
이 얼마나 나를 작게 만드는 시인가.

야경꾼이,
밤새 잠못들게 하는 개의 울음소리가,
애놈의 투정이
신나게 게임하다 이유없이 다운되던 컴퓨터가
비운의 여주인공이 복수를 하는 찰나 지지직 대는 테레비가
간만에 외식나간 식당의 맛 없는 음식이
수도꼭지 수리비를 안 준다는 전셋집 주인이
직장 상사가, 만원 지하철에서 나를 뭉개며 자신도 뭉개지던 이름 모를 행인이
난 그리도 그들에게 분노하고 살며 살아가고 있다.

이런,
난 김수영이 아니다라는 스스로에게 도망갈 구멍을 주지만
이 시를 읽는 순간 그 누가 김수영이 아니겠는가.

분노하지 말자, 그리고 분노하자